"지방 발령된다면 그만두겠습니다"···탈수도권 거부하는 젊은 직장인
2020.09.19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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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경제부처 소속인 A사무관은 수도권에 식구들을 남겨 둔 채 수년째 정부세종청사 근처에서 홀로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 평소 금실이 좋았던 처는 요즘 주말에 재회할 때마다 A사무관에게 쏟아내는 짜증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서울 직장을 그만둘 수 없어 남편과 떨어진 채 평일 내내 독수공방을 감내해야 하는데다가 어린 자녀까지 혼자 돌봐야 하는 육아 스트레스가 쌓인 탓이다. A사무관은 이러다가 부부관계에 파탄이 오겠다 싶어 서울권 직장으로 이직이라도 해야 할지 고민이다.# 또 다른 정부부처의 B과장에게는 출퇴근길이 지옥 같다. 서울에서 통근버스를 타고 정부세종청사로 출퇴근하다 보니 매일 4시간 이상 왕복할 때마다 좁은 버스 좌석 안에서 견뎌야 한다. 이렇게 몇 년을 지내다 보니 체력이 완전히 방전됐다. 차라리 세종시로 이사 가자고 아내를 설득했지만 핀잔만 돌아왔다. “서울 집값이 몇 년 새 갑절로 뛴 것을 못 봤느냐. 아등바등 모아서 서울 외곽에 작은 아파트 하나 겨우 마련했는데 이거 팔고 지방으로 내려가면 평생 서울로 재입성하지 못한다”는 힐난이었다.
A·B씨의 사례는 특수한 에피소드가 아니다. 정부세종청사가 지난 2012년 입주를 개시한 후 이들과 같이 비자발적으로 주말·주중에 서울~지방 원정을 반복하는 ‘신종 유목민’들의 사연이 넘쳐난다. 정부가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를 분산시키겠다며 천문학적인 혈세를 쏟아붓고 LH공사를 빚더미에 앉히면서까지 중앙부처·공공기관 지방 이주를 강행했지만 상당수 공무원은 여전히 수도권 거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사회 분야 정책부처의 C국장은 “저 같은 고위공무원단은 ‘회사(공무원들이 자신 소속 부처를 지칭하는 은어)’를 얼마나 더 다닐지 알 수 없어 굳이 세종시로 이사할 유인이 적지만 젊은 사무관이나 과장들은 최소 10~20년가량은 더 회사를 다녀야 해 원거리 출퇴근이나 주말부부 생활을 하지 않고 세종시로 이주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결과를 보니 젊은 직원들도 상당수가 서울·경기권에 실질적인 주소를 두고 몸만 세종시로 왔다 갔다 하더라”고 전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여성가족부처럼 서울에 남아 있는 부처 근무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는 분위기도 공직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탈수도권을 거부하는 직장인들의 저항은 비단 정부세종청사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민간기업·공공기관·연구소 등을 가리지 않고 전국 지방에서 광범위하게 이어지고 있다. 국민연금공단이 대표적인 예다. 2017년 전북 전주시로 이전하자 기금 수익을 불려야 할 핵심인력들인 기금운용 담당자들이 60명 이상 사표를 내고 이직했다. 지역균형발전을 유인하려는 정부 보조금 혜택 등을 받고 지방으로 과감히 이전했던 민간업체 A사의 한 관계자는 “정부·지자체가 편의를 많이 봐준 덕분에 회사를 지방으로 옮기는 데 재무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무리는 없었다”면서도 “직원 중 대부분은 여전히 서울·경기권에서 출퇴근하거나 가족을 서울에 남겨두고 혼자 회사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어 장기근속에 어려움을 겪게 될까 봐 걱정이 많다”고 전했다. 한 과학기술특성화대의 부총장은 “정부 출연 연구소들 중에는 지방에 분원를 두는 경우들이 있는데 우수한 인력들이 내려가지 않으려 하다 보니 출연연 분원들은 분원 근무를 좌천성으로 받아들여 꺼리는 경우가 많더라”고 설명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신규 인재 구득난이다. 기존 재직자들이야 수도권에서 원정 출퇴근을 하든, 나 홀로 지방 자취를 하든 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근무처 지방 이전에 적응해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고급 인재가 필요한 주요 직책·직위에 대한 신규 채용은 지원자를 구하기가 힘들어 난항을 겪는 경우가 다반사다. 충북 청주시 오송읍으로 일찌감치 이전한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국민보건을 책임질 핵심인력인 의약품 허가심사인력 등을 적정 수준으로 충원하지 못해 수년째 허덕이고 있다. 국내외에서 신약·복제약의 개발 속도가 빨라지고 제품 종류도 한층 다변화하면서 이들 제품의 인체영향 등을 정밀하게 평가할 전문인력을 더 늘려야 하지만 증원은커녕 지방 이전 후 퇴사한 인력구멍을 채우는 것조차 지원자를 구하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다고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속사정도 다르지 않다. 앞서 2016년 원주로 1차 이전한 데 이어 최근 준공된 원주 2청사로 수도권 잔류 조직의 2차 이전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제관리실을 비롯해 혁신연구센터·심사실·자동차보험심사센터 등 11개 잔류부서 총 1,095명이 2차 원주 이전 대상(11월29일~12월15일)인데 벌써 약제관리실 등에서 이탈 인력이 나와 심평원은 해당 인력 공백을 충원하기 위한 구인을 개시했을 정도다. 중부권에서 창업한 게임 분야 스타트업 D사는 자사 콘텐츠가 구글플레이 등 앱스토어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한 후 해당 게임 업데이트와 신작 제작을 위한 개발인력을 충원하려 하지만 쓸 만한 사람을 구하지 못한 채 1년 가까이 허비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지방에도 게임 분야를 전공한 개발자들은 있지만 대부분 서울이나 판교에 있는 회사로 취업을 하거나 수도권 창업을 하려 해 여기(지방)에서는 실력 있는 사람 구하기가 힘들었다”며 “지금까지는 소수의 창업멤버들이 밤샘으로 일해가며 버텨왔지만 이런 식으로는 지속하기는 힘들어 서울권의 창업지원센터 중에 사무실을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민관이나 산학연을 가리지 않고 직장인들의 지방행 기피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데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의 부동산 가치 양극화 심화와 같은 재산 문제와 자녀 진학 등 교육 문제가 가장 크고, 맞벌이인 경우 배우자 중 한 명이 서울·인천·경기권에 직장을 두고 있어 부부가 동시에 지방으로 이전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병원 갈 일이 많은 고령 부모나 유아기 자녀를 부양하는 직장인이라면 상대적으로 의료 인프라의 양적·질적 수준이 높은 수도권을 떠나기 어려운 현실적인 측면도 있다. 이 밖에도 수도권의 친구·지인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고독·소외감에 대한 두려움, 지방 문화·생활편의시설의 상대적 부족에 대한 불만 등 다양한 이유가 얽혀 있다. 따라서 정부도 단순히 기업·공공기관과 같은 직장을 지방으로 유치하면 수도권 인구가 자연히 분산될 것이라던 기존의 고정관점을 벗어버리고 지방 정주환경 개선과 부동산 등 자산가치 양극화 해소 쪽에 초점을 맞춰 지역균형발전을 보다 현장감각 있게 추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http://n.news.naver.com/article/011/0003659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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